평양의 단군릉
1993년 10월 북에서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이 지역에서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가 발견되었는데 감정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남자의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적용해 2개의 전문연구기관에서 현대적 측정기구로 각각 24회, 30회씩을 측정한 결과 그 연대가 5,011전의 실존했던 단군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단군릉을 새롭게 조성해 일반에 공개하고 한민족 최초의 고대 국가로 얘기하고 있다.
그림1> 1994년 단군릉 복원 후 운집한 평양 시민들
그림2>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의 모습
단군릉의 총부지 면적은 456,000제곱미터(m²)이다. 북에서 새롭게 복원한 단군릉은 크게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단군릉개건기념비구역과 석인상 구역 및 중심구역이 그것이다. 중심구역은 길이 101.7m, 너비 97.5m되는 넓은 구역으로서 그 안에 한단을 높인 길이 84m, 너비 80m 되는 기단이 있고, 이 기단 위에는 무덤무지를 중심으로 하여 돌상과 돌향로, 돌범상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은 1,994개를 다듬어 쌓아 올려 높이가 22m, 너비가 50m에 달하고 있다.
그림3> 1,994개의 화강암으로 다듬어 올린 단군릉의 웅장한 모습
그림4> 단군릉의 평면도 모습
그러나 남한 학계에서 단군릉은 아직도 단군릉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과연 고조선의 건립이 평양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평양 수도론은 남한학계에서 조차 확실하게 검증되지 못하고 있다. 즉 고조선의 수도가 한반도 안쪽인가? 바깥쪽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로 최초 단군릉을 발굴할 당시의 무덤 형태가 고조선의 고유의 무덤양식인 고인돌이 아닌 고구려 양식의 무덤으로 변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이에 대한 문제에 북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단군릉을 새롭게 증축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남한 학계에서는 이러한 고구려의 단군릉 증축설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림5> 발굴 전의 단군릉 모습
세 번째로 북이 말하는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다. 북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2군데 이상의 검토와 30차례에 걸친 측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가지 북의 단군릉에 대한 불신이 있으나 북에서 주장하는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단군릉에 대한 과거 사료를 보면 조선왕조실록 중 <숙종실록> 1697년 7워 f14일 기록에 “숙종이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를 해마다 수리할 것을 상주한 이인엽의 제의를 승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영조실록>, <정조실록>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림6> 조성왕조실록 중 숙종실록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등에서 단군릉이 평양에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Social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