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을밀대 (乙密臺)

작성자
역문협
작성일
2021-03-05 15:33
조회
604
지역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시대 : 고구려

유형 : 건축물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9호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에 위치하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 시기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세워진 누정이다. 장대란 전투시 군사의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뜻하며, 을밀대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을밀대’라는 이름은 이 봉우리의 옛날 이름인 ‘웃밀이언덕’에서 유래했다는 설, 또는 이 장소에 ‘을밀선인’이라는 선녀가 자주 놀러 온 장소라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는 수나라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시기, ‘을밀’이라는 이름의 장수가 이 대를 지켜 싸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전설들은 을밀대의 역사가 짧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름과 관련하여 을밀대는 ‘사허정’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사방이 트여있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부벽루, 영명사 등과 함께 ‘평양8경’ 중 하나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을밀대의 축대는 1714년 조선 숙종 때 위의 누각과 함께 보수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하지만 일부분은 현재까지 고구려 축성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축대의 모서리 부분이다. 축대의 모서리 부분은 크기가 큰 통돌을 사용하여 들여쌓기를 하고 있다. 윗칸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것이며, 건물이 웅장하게 보이게 한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건물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해준다. 두 번째는 육합쌓기를 들 수 있다. 여러 돌들은 단순하게 쌓아 올려지지 않고, 하나의 돌이 여섯 개의 돌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기법은 한 개의 돌이 탈락하더라도 나머지 돌들이 무너지지 않는 효과를 낸다.

축대 위에 지어진 누정은 정면은 3칸, 측면은 2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건축물이다. 현판에 적힌 ‘乙密臺’라는 글은 구한말 서북지역의 유명 서예가였던 호정 노원상이 썼다고 전해진다. 누정의 기둥은 밑 부분에 높이 1m 정도의 4각 돌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흘림기둥을 세워 비바람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 있다. 이는 개성의 남대문과 같은 기법이며, 조선 후기에 사방이 개방된 장대 건축에서 흔히 발견되는 수법이다. 기둥 위의 공포는 두 개의 날개 모양이 위·아래로 합쳐진 이익공을 얹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장식하는 화반에는 귀면문 또는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그밖에 누정에 입힌 화려한 모로단청과 부재에 그려진 귀문과 여의주를 든 용은 다채로움을 더해준다.

을밀대에는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조상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왜군이 대동강까지 쳐들어왔을 때, 을밀대를 방어하고 있던 조선 군대는 적은 병력을 숨기기 위해 성벽 안의 나무에 흰 천과 위장 전술을 써서 왜군의 대동강 도하를 6일간이나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성안의 주민들은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을밀대는 6·25전쟁 시기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지만 1959년에는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였고, 그 후에도 단청 공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유지 및 보수를 함으로써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이정훈)

<참고문헌>
김정배, 2005,『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어: 을밀대 (http://encykorea.aks.ac.kr)/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 지식포털 검색어: 을밀대 (http://portal.nrich.go.kr/)

을밀대 전경1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을밀대 축대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을밀대 전경2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을밀대 3D복원원

Ⓒ동북아역사넷

을밀대 단청

Ⓒ조선향토대백과

정회원이 되세요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