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의 잡지 《금수강산》10월호(통권 제398호)에 라선시 초도에서 새로운 청동기시대 유적 및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유적 발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라선시 민족유산 보호관리소를 비롯한 민족유산보호부문의 일꾼들과 연구사들이 최근 라선시 라진구역 해양동의 초도에서 조선 사람(우리 민족)의 형성 과정과 이 지역 청동기시대 문화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역사유적을 발굴하였다. 유적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묻힌 무덤으로서 장방형의 구덩이 안에 나무관(木棺)을 묻어 놓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두 명분의 사람 뼈와 20 여점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초도에서 발굴된 사람 머리뼈) 사람 뼈는 머리뼈 봉합상태와 관절 부위의 특징으로 보아 20~30세 되는 남성과 여성의 것으로 인정되며, 우리나라에서 신인(Homo Sapiens) 단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조선 사람의 고유한 특성이 신석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을 거쳐 청동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으로 련면히(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머리뼈의 형태를 보면, 남자는 단두형(短頭型)이고 여자는 단두형에 가까운 중두형(中頭型)이다.  머리뼈의 인류학적 특징들을 보면 이마가 아주 곧고 얼굴뼈가 중간 얼굴형이며, 콧마루가 낮고 중간코형에 속한다. 눈확(눈구멍)은 높은 눈확형에 해당되며, 입천장이 아주 넓은데 이것은 청동기시대 조선옛유형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들이다. 이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청동기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살고 있던 조선 사람의 직계 선조이며,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던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의 고유한 인류학적 특징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초도에서 발굴된 간석기와 질그릇 유물들) 무덤에서 나온 곰배팽이, 도끼, 자귀, 활촉, 창끝, 찌르개살과 같은 석기들은 여러...
역문협 2022.11.02 0 조회 114 | 지역: 라선시 라진구역 해양동 초도 | 시대: 청동기시대 | 유형: 발굴유물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유적 제192호 ▷1027년(고려 현종 18년) 창건, 2005년 개건 ▷총면적 6만여 m², 연건평 4천여 m², 전각 29채 영통사는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오관산 령통골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시대 사찰이다.  1027년(현종 18)에 왕실 원찰로 건립되었으며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이기도 하다. 원래 영통사는 태조 왕건이 건립한 숭복원(崇福院) 자리에 새롭게 지은 사찰인데, 숭복원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의 외조부 보육(寶育)이 살던 암자를 확장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영통사 전경 영통사 보광원과 5층석탑 ⓒ 진천규 영통사는 우리나라 불교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널리 퍼뜨리고 그 시조로 명성이 높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활동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대각국사는 1055년 9월 개성 만월대에서 고려 11대 국왕 문종(재위 1047~1082)의 넷째 아들(속명: 왕후)로 출생해 1065년 10살 때 영통사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대각국사는 '교관겸수(敎觀兼修, 교종과 선종을 아울러 수양해야 한다)'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興王寺)에서 교단통합운동을 벌여 우리나라 불교 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크게 퍼뜨리고 그 시조가 됐다. 대각국사 의천의 영정(전남 순천시 선암사) 고려시대의 금속화폐 대각국사는 생애의 전 기간 불교의 학설을 깊이 탐구하여 수많은 불교 경전들을 집성하고 방대한 규모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당시 아시아 불교계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또한, 형이었던 고려 15대 국왕 숙종(재위 1095~1105)에게 화폐 사용을 건의하여 건원중보(乾元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은병(銀甁) 등의 다양한 금속 화폐를 제작하고 보급에 힘썼다. 한편, 『고려사』에 따르면 영통사에는 세조(왕건의 아버지 왕륭)와 태조, 문종, 인종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역문협 2022.10.20 0 조회 187 | 지역: 개성시 룡흥동 | 시대: 고려시대 | 유형: 사찰 | 종목: 국보문화유물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74호 ▷1974년 발굴, 1993년 개건 ▷남북 길이 132.8m, 동서 너비 223m, 총면적 3만m² 정릉사는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 앞쪽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절이다. 고구려의 절터는 정릉사를 비롯하여 청암리에 위치한 금강사터, 원오리절터, 상오리절터 등이 존재하는데, 정릉사는 현존하는 절터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 역시 우수하다. 1974년 발굴 당시 동명왕릉과 정릉사터 정릉사 가람배치도 구글어스를 통하여 본 동명왕릉과 정릉사 위성사진 ⓒGoogle 정릉사 복원도 정릉사의 규모는 남북 길이 132.8m, 동서 너비 223m, 총면적 3만m²이며, 창건 당시 총 18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절의 중앙엔 8각 7층목탑(기단 너비 20.4m, 높이 약 60~70m)과 그 주변으로 3개의 금당과 중문, 강당을 두어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형태인 1탑 3금당 형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중앙동 좌우로 부속건물들이 조성되었으며 건물 둘레를 회랑으로 둘러쌓았다. 그리고 절의 뒤켠에는 8각형 형태의 우물이 온전하게 발굴되었는데, 우물에서는 투구, 방패 등을 비롯한 철제품과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定)’, ‘고구려(高句麗)’, ‘정릉(定陵)’, ‘릉사(陵寺)’ 라고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이 출토되어 북 학자들이 동명왕릉의 수호 사찰인 ‘정릉사’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정릉사 입구 문에 높이 달린 현판은 출토 당시 그릇에 새겨진 글씨 원형을 살려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토제품, 목제품, 석제품을 비롯해 동식물류들의 유골이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특히 동물뼈 중에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사냥하여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사슴, 노루, 너구리 등 11종이 발굴됐고 총 35종에 1,130점이나 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역문협 2022.09.29 0 조회 165 | 지역: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 시대: 삼국시대(고구려) | 유형: 사찰 | 종목: 국보문화유물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47호 현재는 폐사되어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중흥사(重興寺)는 고려의 태조(877~943)가 창건한 절로 알려졌으나, 1590년(선조 23년)에 편찬된 『평양지(平壤誌)』에서는 그 창건연대를 광개토대왕 시기(391~412)라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중흥사 터에서 고구려의 기와 조각들이 다량 출토되어 절의 창건연대를 고구려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불화가 그려진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던 깃발대인 당간(幢竿)을 지탱하기 위해 당간 좌·우에 세운 기둥(支柱)이다.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돌로 제작된다. 중흥사의 당간지주는 현재 좌·우 한 쌍으로 세워진 지주(支柱)만 남아 있는데, 그 높이는 약 4m로 현존하는 한반도의 당간지주 중에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게다가 당간의 높이는 보통 지주 높이의 약 4~5배이므로 중흥사의 장대 높이는 약 16~20m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당시 중흥사의 규모 또한 웅장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간지주의 외형은 전반적으로 세장형을 띄고 있는데, 모서리를 없애는 모죽임을 하지 않아 전체가 예리하게 보인다. 지주의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아랫부분에는 간공(竿孔), 최상단에는 V자형으로 간구(杆溝)가 뚫려있다. 지주의 하단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한 간대(竿臺)가 있으며, 그 아랫부분인 기단석은 현재 매몰되어 상면만 드러나 있다. 중흥사의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당간지주 중 하나이며, 과거 중흥사의 위치와 규모를 짐작 가능케 하고 당시의 석조물 연구에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이정훈) <참고문헌> 문화성물질문화유물보존소, 1963, 『우리나라 주요 유적』, 군중문화출판사/ 국립문화재연구소 검색어:중흥사당간지주 (http://portal.nrich.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검색어:중흥사당간지주 (http://encykorea.aks.ac.kr) 중흥사당간지주 전경 Ⓒ국립문화재연구소 중흥사당간지주 평면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중흥사당간지주 입면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역문협 2021.03.19 1 조회 940 | 지역: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1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당간지주 | 종목:
진주못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의 서쪽에 있는 인공연못으로 고구려사람들이 왕릉을 옮겨올 때 만든 것이라고 전한다. 못은 제(梯)형으로 그 가운데 4개의 섬 모양 흙무지가 쌓여있다. 이 섬들은 모두 원형으로서 그 위에는 버드나무가 심겨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이 못은 그 깊이와 축조 연대를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그 결과, 원래의 못 바닥은 현재의 바닥보다 약 4.4m나 더 깊었으며, 크기 또한 원래의 것보다 훨씬 작아진 사실들이 보고되었다. 연못이 원래의 규모보다 작아진 이유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물과 함께 흘러내린 토사가 못을 메꾸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논을 경작한 것에 있다고 밝혔다. 한편, 연못의 서쪽 둑 남쪽 끝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주거지 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붉은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이 연못이 고구려 시기의 유적으로 편년이 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외에도 바닥 조사 중에는 탄화된 연꽃 씨앗이 발견되어 원래 이 연못은 연꽃잎이 무성했던 곳이라고 추정하였다. ‘진주못’이라는 이름은 과거 동명왕릉을 ‘진주묘’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옛날에는 ‘진주지(眞珠池)’라고 불렀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있다. 1986년 북한 정부는 못을 크게 확장하고 정각도 세워 시민들의 문화휴식터로 조성했다. 또한, 연못가의 8각 정자는 못을 발굴할 때 나온 기와 조각에 기초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정훈) <참고문헌> 김일성종합대학, 1976,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북한정보넷 검색어:진주못 (http://www.cybernk.net)/ 진주못 실측도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
역문협 2021.03.19 0 조회 862 | 지역: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 시대: 고구려 | 유형: 연못 | 종목: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북쪽의 월봉산 남쪽 구릉지역에는 여러 기의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과 벽화무덤(벽화분)이 위치한다. 총 9기의 무덤이 보고되었으며, 이 중 돌칸흙무덤으로 보고된 무덤은 1호, 2호, 3호, 6호, 7호, 8호, 9호무덤의 6기이다. 4호, 5호 무덤은 벽화무덤으로서 추후에 ‘청계동벽화무덤’으로 따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6기의 돌칸흙무덤은 모두 반지하식에 안길(연도)과 주검칸(현실)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으로 무덤의 축조형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안길과 주검칸의 벽면은 모두 막돌(자연석) 또는 깬돌(할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중간의 비어있는 이음부분은 회반죽을 채워 넣었고 겉면에는 회미장을 하여 마무리하였다. 바닥도 대부분 회미장으로 마무리하였는데, 1호무덤의 경우 회미장 아래에 숯을 깔아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차단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9호무덤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안길과 주검칸 사이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현문이 존재한다. 그 중 1호무덤은 문확시설이 달려있어 현문을 잘 고정시켜주고 있는데, 이는 문확시설이 없어 앞으로 무너져 내린 다른 무덤들의 현문과 비교된다. 평천정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길과 다르게 주검칸의 천정들은 대부분 무너져내려 본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1호무덤의 경우, 아직 천정이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그 형태는 ‘평행삼각고임천정(모줄임천장)’이다. 이는 무덤 천정의 네 귀퉁이에 삼각형의 받침돌을 놓아 천정을 올리는 방식으로 평면모습을 보았을 때, 사각형 안에 마름모·마름모 안에 사각형이 들어 있는 모습을 띤다. 평행삼각고임천정은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은 1호무덤의 천정형식을 통해, 1단의 평행고임만 남아있는 2호무덤 또한 평행삼각고임식 천정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청계동 무덤들은...
역문협 2021.03.19 1 조회 653 | 지역: 평양시 룡성구역 청계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평양시 용성구역 청계동에 위치한 청계동고구려돌칸흙무덤떼 중 제4호무덤과 제5호무덤이 벽화무덤에 해당한다. 제4호벽화무덤은 제1호무덤에서 서북쪽으로 약 135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무덤무지는 발굴 당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무덤무지의 크기는 남북직경 9m, 동서직경 7.8m, 높이는 0.7m 정도였다. 무덤은 능성의 경사면을 평평하게 깎아내어 주검칸, 안길칸, 안길을 마련한 반지하식의 외칸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주검칸의 크기는 길이 256cm, 너비 240cm, 남은 벽의 높이는 80cm이다. 주검칸은 정방형의 외칸으로서 바닥에 1개의 관대가 주검칸 중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관대시설은 작은 막돌 또는 판돌로 약간 높이고 그 위에 회미장을 하였다. 안길은 주검칸의 남벽 중심에 설치되었다. 안길의 크기는 길이 140cm, 너비 134cm, 벽의 높이 76cm이다. 안길칸은 안길과 같지만 길이와 너비를 안길보다 작게 만들었다. 안길칸의 크기는 길이 40cm, 너비 110cm, 높이 80cm이다. 문시설도 있었으나 파괴되어 없다. 이 무덤은 심한 도굴로 인해 유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벽화의 흔적은 약간 남아있지만 이마저도 다 떨어지고, 떨어진 벽화들도 매우 희미하다. 제5호벽화무덤은 제4호무덤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다. 무덤은 발굴당시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주검칸 및 안길도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무덤은 주검칸, 안길칸, 안길로 된 반지하식의 외칸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주검칸의 크기는 길이 286cm, 너비 256cm, 남은 벽의 높이는 172cm이다. 주검칸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회벽은 많이 떨어졌는데 남아 있는 회벽과 떨어진 회벽에는 희미하게 벽화의 색소가 남아 있다. 주검칸 바닥에 동, 서벽에 치우쳐...
역문협 2021.03.19 1 조회 674 | 지역: 평양시 용성구역 청계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에 위치한 청운산의 남쪽 경사면에 10여기의 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무덤은 파괴되었으며 그 중 서남쪽에서부터 3번째 자리에 놓인 무덤 1기만 발굴하였다. 해당 무덤을 발굴한 당시에 무덤무지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남은 무덤무지의 크기는 직경 6.5m, 높이 1m 정도였다. 무덤칸은 판돌을 이용하여 돌관처럼 만들었다. 남쪽에 세웠던 판돌은 없어졌거나 넘어져 있었다. 안길 시설은 따로 없으며 무덤칸의 남쪽 벽에 판돌을 세워 문의 역할을 하게 두었다. 무덤칸의 천장은 2개의 판돌을 잇대어 덮은 평천정으로 발굴 당시에는 깨져있었다. 바닥은 평평한 면이 위로 올라오게 막돌을 깔아놓았다. 발굴한 무덤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었다.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로는 회색질그릇조각 1개, 부러진 쇠관못 3개가 있다. 회색질그릇조각은 부드러운 진흙에 가는 모래를 약간 섞어서 만든 것으로 겉면은 회색이다. 쇠관못은 버섯갓 모양의 대가리에 단면이 네모나고 끝이 뾰족한 대가 붙어 있는 것들로, 매우 삭아서 대가리 부분만 남은 2개와 못대부분 조각 1개였다. 못대가리의 직경은 2.5cm, 대의 굵기는 1cm이다. (정슬주) <참고문헌>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고구려의 돌칸흙무덤(1)』(조선고고학전서30), 진인진
역문협 2021.03.19 0 조회 604 | 지역: 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21호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최승대는 금수산 모란봉 꼭대기에 세운 누정이다. 최승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평양 북성의 북쪽 맨 끝으로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이며, 모란봉의 가장 높은 곳인 최승대에 앉았을 때 명승지의 운치를 더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최승대는 모란봉을 찾는 사람들에게 문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명소 중 하나로 되고 있다. 최승대의 자리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북장대 터였다.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운 최승대는 1714년(조선 숙종 40년)에 평양성을 수축하면서 흙을 올려 봉우리를 10m 가량 높여 봉화대를 만들고, 1716년에 모란봉 꼭대기에서 현무문으로 내려오는 중간 지점에 ‘오승대’라는 정자를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오승대는 1849년(조선 헌종 15년)에 개축하였다. 1894년(조선 고종 14년) 청일전쟁 때 봉화대가 파괴되고 오승대는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34년간 폐허로 남아있다가 1927년에 정해문루를 청류벽상으로 옮겨 짓는 공사와 함께 모란봉 꼭대기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의 최승대이다. 지난 6·25전쟁 시기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최승대는 1959년에 국가에서 원상태로 복구하였고, 그 후에도 단청을 비롯한 보수공사를 여러 차례 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최승대는 0.7m 높이의 축대를 쌓고 정각을 세웠는데 그 규모는 앞면 3칸(길이 7.36m), 옆칸 2칸(길이 4.67m)이다. 최승대의 규모와 형식은 합각지붕에 2익공 외도리식 겹처마건물로 축대 위에는 앞면의 계단을 제외하고 4면으로 여장을 둘렀는데, 총 연장 길이가 32.2m이다. 단청은 조선 말기의 형식인 모루단청으로 장식되었다. (정슬주) <참고문헌> 정호섭, 2016, 『남북공동문화유산 현황...
역문협 2021.03.18 1 조회 896 | 지역: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누정 | 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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