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고조선인가, 소(小)고조선인가?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10) 고조선의 강역논쟁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까지 2800여 년 동안 존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나라 5000년 역사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고조선에 관한 역사기록이 대부분 소실돼 버린 탓에 고조선의 구체적 면모를 알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 발전에 힘입어 문자기록의 부재부분을 상당정도 보완할 수 있게 됐고, 고조선의 면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중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문제를 이해하는데 고고학적 연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문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 못지않게 고조선에 대한 논쟁점 중에서도 매우 뜨거운 분야에 속한다.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는 요동설과 평양설, 중심지 이동설로 대별되는데, 요동설을 강하게 주장하던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단군릉 발굴을 계기로 평양설로 정리함으로써 남북 사이에 이견이 많이 해소됐다. 하지만 고조선의 강역문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고조선의 강역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고조선-한 전쟁 이후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고조선 명칭의 유래
고조선은 당대에 쓰던 국호가 아니다. 당대에 쓰던 국호는 조선이다. 이 정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안다. 그런데 고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흔히 후대의 조선(이씨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렇지 않다. 고조선이란 명칭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유사>이다. 이 책은 알다시피 고려 충렬왕 때(1281년경) 중 일연이 쓴 우리나라 역사책이다. 그 책 첫머리에 단군신화가 기술돼 있는데, 그 제목이 ‘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으로 돼있다. 삼국유사에서 처음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썼을 때, 그 의미는 이씨조선과 구별되는 고조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칭 기자조선으로 알려져 있던 후조선과 구별되는 옛 조선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고조선이란 명칭은 후조선에 앞선 단군조선 왕조를 지칭하는 역사적 개념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근대이후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봉건 조선왕조(이씨조선 왕조)와 구별되는 옛 조선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돼 왔다.
봉건 조선왕조와 구별되는 옛 조선(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붕괴되기까지 2800여 년간 존속했는데, 이 기간동안 단군조선(전조선), 후조선, 만조선 세 왕조가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사용돼는 고조선은 단군 조선, 후 조선, 만 조선, 세 왕조를 포함된 개념이다. 고조선의 첫 왕조인 단군조선은 최근 단군릉 발굴로 기원전 30세기 초에 건국됐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단군조선 붕괴와 후조선 건국의 경위와 연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 <삼한 시귀감> 등 단군조선을 다룬 여러 역사책들에서 단군조선 1500년 설을 채택하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제기한 단군조선 건국연대(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와 붕괴연대(주 무왕 원년 기원전 1122년)를 계산하면 1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중 일연은 이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 조선 1500년 설을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 단군조선 1500년설’이 중국 요 임금 즉위나 주 무왕과 관계없이 우리나라에서 따로 전해오던 유력한 연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 고유의 전승으로 단군조선 1500년설이 대대로 전해져 와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사실로 고착됐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단군조선의 붕괴와 후조선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15세기경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것은 최근연도에 발굴된 유적 유물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후조선은 자신의 전성기 때 서쪽지역으로 영역을 크게 확대해 난하 유역에 이르렀는데, 이를 보여주는 유적 유물이 바로 위영자 문화(기원전 14~12세기)와 그를 계승한 능하 문화(기원전 11~4세기)이다. 위영자 문화와 능하 문화는 비파형동검 문화, 좁은 놋단검(세형동검) 문화에 속하며, 후조선 시기에 고조선 사람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창조한 문화이다. 이 문화의 연대로 볼 때 기원전 15세기 말~14세기에 후조선 왕조가 안정돼 서부 영토를 크게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붕괴연대는 기원전 15세기경으로 보는 게 옳다. 후조선 왕조는 기원전 15세기부터 만이 후조선 왕조를 붕괴시키고 만왕조를 세운 기원전 194년까지 1200여 년간 존속했다.
대(大)고조선인가, 소(小)고조선인가?
고조선의 중심지 수도는 줄곧 평양이었다는 것을 남북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매우 크다. 강역에 대한 견해 차이는 강역의 크기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견해 차이를 담고 있다. 소(小)고조선론자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크지 않은 영역을 갖고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해, 한반도 전체의 문명화(고대화)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치 않았다고 본다. 즉 한반도의 본격적인 문명화 과정은 삼국시대에 비로소 본격화됐는데, 여기에 고조선의 영향은 별로 크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에 대(大)고조선론자들은 단군조선(전조선)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문명화(고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본다. 단군조선이 처음 건국됐을 때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압록강 이남, 강화도를 포함한 임진강 이북 오늘날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포괄하는 나라로부터 시작됐으나, 건국이후 신석기 시대 이래 우리겨레가 살고 있었던 지역들(한반도, 만주, 연해주)에 고대문명 전파를 통해, 고대화(문명화)를 촉진하고, 자신의 강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단군조선 전성기에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연해주 남부지역을 다 포괄하는 대국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 고조선(단군조선) 강역도 (BC 30세기 초~ BC 15세기 중엽)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핵심 쟁점 중 하나는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 단군조선의 강역에 포함됐었는가 여부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단군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 근거로 고인돌의 형태 차이를 들고 있다.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의 분포지역만이 단군조선의 강역에 속하는데, 한강이남에서는 탁자식 고인돌이 없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강역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강 이남지역에서도 탁자식 고인돌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설득력이 없게 됐다. 고인돌의 유형을 남방식, 북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이다. 일제 강점기 어용사학자들은 한반도 남과 북의 고인돌의 기원이 서로 다른 것처럼 왜곡하기 위해 남방식, 북방식이라는 비과학적 용어를 조작해냈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반도 고인돌의 기원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에서 발전해 왔다. 그것은 평양근처 침촌리에서 발굴된 초기형 고인돌 무덤(침촌형 고인돌 무덤)으로부터 기원해 오덕형(탁자식) 고인돌 무덤 양식과 묵방리형(개석식)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해 왔다. 즉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발전해 왔으며 한강이남 지역에서도 이 세 가지 유형의 고인돌 무덤 양식이 모두 발견됨으로써 서로 기원이 다른 것처럼 묘사된 남방식, 북방식이라는 용어는 폐기돼야 한다. 한강이남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남방식으로 불렸던 기반식 고인돌 역시 한강 이북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 단군조선의 강역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사라졌다.
반면에 대고조선론자들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 만주, 연해주 지역을 단군조선 강역으로 본다.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 단군조선 강역이었다는 것은 역사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으며, 유적 유물 자료로써도 확증될 수 있다고 본다.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 역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역사자료는 <제왕운기>(고려 충렬왕 때 유학자 이승휴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이다. <제왕운기>에서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맥이 다 단군의 통치 지역이었다고 한 것은 단군조선의 강역이 실제로 요하하류 동쪽, 북류 송화강 유역 남쪽, 연해주 남부지역, 한반도 전체까지 광대한 지역을 다 포괄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라는 후기 신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 다 단군조선의 통치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대표하는 표지 유적 유물을 통해서 보다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보여주는 표지 유적 유물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을 들고 있다.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이 분포돼 있는 지역이 단군조선의 강역이라는 것은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합의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 유적 유물의 분포지역을 확인해 보면 단군조선의 강역을 확증할 수 있다. 특히 비파형동검은 형태와 제작방법에 있어서 매우 독특해, 이웃지역의 청동제품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청동검인 동주식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형으로 제작됐으며, 북방지역 오르도스 동검 역시 일체형이다. 반면에 비파형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분리된 조립식이다. 이러한 청동검 제작방법은 이후 세형동검(좁은 놋단검)으로까지 계승돼 고조선의 고유한 문화양식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이 함께 발굴되는 지역은 단군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통치력과 영향력이 미쳤던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한강이남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역시 단군조선의 강역에 속했다고 확증할 수 있다.
한강이남 한반도 중남부지역 전역에서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 발굴됐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인돌의 문화적 뿌리가 다른 것처럼 왜곡했던 남방식, 북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반도 전 지역에서 고인돌 문화의 뿌리는 평양지역 근처 침촌리에서 발굴된 침촌형 고인돌에서 연원한다. 고인돌의 초기형인 침촌형 고인돌은 한강 이남지역에서도 발굴됐다.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 충북 제천시 황석리, 대구시 대봉동 등지에서 발견된 고인돌 무덤은 평양일대에서 발견되는 침촌형 고인돌 무덤(3, 4형식)으로, 축조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000년기 후반기에 해당된다. 또한 한강이북 지역에서만 발굴되었다는 오덕형 고인돌 무덤(탁자식 또는 북방식 고인돌 무덤)이 충북 제천시 황석리, 옥천군일대, 전북 고창군 도산리 죽림리 일대, 전남 나주시 일대, 전남 완도, 노화도, 대당리,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강진군 지석리 고인돌 무덤을 비롯해 낙동강 영산강 한강유역 일대에서 많이 발견됐다.
▲ 고창 도산리 오덕형 고인돌(탁자식, 북방식)
▲ 평안남도 개천군 묵방리 노동자구 일대 묵방형 고인돌 무덤(남방식)
또 한강이남 지역에만 있다 해서 남방식이라고 불리던 고인돌 무덤은 키 큰 오덕형고인돌 무덤(탁자식)을 제외한 키 낮은 고인돌 무덤 전반을 가리키는데 1980년대 말 평양근처 남포시 용강군 석천산 고인돌 무덤떼의 발굴을 시발점으로 평남 개천시 묵방리, 숙천군, 평원군, 대동군, 증산군, 성천군 및 평성시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조사 발굴됐다. 이로써 한반도 고인돌 무덤은 남이나 북이나 그 기원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기원(침촌형 고인돌무덤)에서 유래된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단군조선과 우리 민족
단군조선은 기원전 30세기초 평양을 수도로 건국됐다. 초기 영토는 강화도를 포함한 한강이북에서 압록강 이남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 해당된다. 단군조선은 건국이후 신석기 시대이래 우리겨레들이 살고 있던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남부지역에 단군조선이 창조한 비파형동검 문화를 비롯한 고대문화를 전파해, 이 지역들의 고대화를 촉진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000년기 중후반에 이르게 되면 한반도 전체를 비롯해 우리겨레가 살고 있던 전 지역의 고대화가 이룩되고, 단군조선의 영역에 편입됐다. 우리 겨레는 단군조선이 붕괴되기까지 1000년 이상 단일한 국가권력의 통치아래 생활했는데, 이 과정에서 핏줄과 언어, 문화의 공통성이 더욱 더 높아지면서 하나이 핏줄,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를 갖는 단일민족으로 발전해 갔으며, 우리나라 정치와 문화의 기초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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