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
위치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고구려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지금의 중국 환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환인의 혼강(우리에게는 비류수로 알려져있는 강) 주변 산정상에서 고구려 초기 고분이 발견되면서 동명왕릉으로 추정된다는 발표를 하였다. 또한 환인의 고속도로 출입구 입구 주변에는 하고자성과 상고자성으로 불리는 대규모의 돌무덤떼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동명왕릉은 환인지역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평양의 동명왕릉은 고구려가 427년 고구려가 국내성(지금의 중국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자신들의 시조인 동명왕릉을 이곳으로 옮겨와 안치한 무덤으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왕릉은 평양의 동남쪽 22km되는 제령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주변에는 또 다른 고구려 무덤 10여기가 함께 있다. 또한 근처에 왕릉의 지키는 정릉사터가 발굴되어 주변을 신성시화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릉은 안길(연도)와 안칸(석실)로 이루어진 동남향의 돌칸흙무덤이다. 무덤은 방대형으로 밑둘레에는 1.5m 높이의 돌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돌의 윗면은 턱을 만들어 위돌이 밀려나가지 않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인들의 돌을 쌓는 방식으로 당시의 과학적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주변으로 사방 5m에는 강돌을 깔아 묘역을 구성하였다.
그림 1 능원의 중심부
그림 2 무덤의 안길
무덤칸은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다듬어서 쌓았다. 무덤길은 무덤칸 복판에 냈는데 바깥길(묘도)과 안길(연도)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길과 안길 사이에는 문을 달았는데 현재는 쇠를 씌운 문확돌이 남아있다고 한다. 안길에서 안칸으로 들어가는 곳에도 역시 문을 달았는데 지금은 문턱과 문확만이 남아있다.
그림 3 무덤칸 실측도
안칸은 방형평면에 꺽음천정이며 그 크기는 동서 4.21m, 남북 4.18m, 높이 3.88m 로 되어 있다.
그림 4 무덤칸 투시도
안칸의 벽과 천정에는 연꽃을 그렸다. 벽화는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맞추어 똑 같은 모양의 꽃무늬를 그린 장식무의이다. 꽃무늬는 6개의 겹꽃잎을 정면으로 도안화한 것이다. 벽화는 가공한 돌 위에 바탕색을 바르고 그 위에 그렸던 것인데 도굴자들의 피해를 받아 대부분이 떨어지거나 지워져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그림 5 안칸 벽면의 연꽃무늬와 안칸 서북모서리에 남아있는 벽화
–고구려의 건국시점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많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연대에 대해서는 남과 북의 역사학계가 저마다의 논리를 내세워 그 시작연대를 다르게 하고 있다.
북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약 27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남에서는 B.C 37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시기의 차이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호태왕비문의 해석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
광개토호태왕비 면 제4행에는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으로 지시해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했다.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이어받았고, 17세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게 됐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광개토왕이 고구려 왕실의 17세손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있는 고구려 왕 계보를 세대수로 계산해 보면 광개토태왕은 12세손으로 돼 있다. 양자 사이에는 5세대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최소 5대왕을 누락한 것이 된다.
북에서는 이렇게 누락된 왕의 계보를 찾아 5세대 왕들을 차례로 넣어보면, 추모왕 – 유류왕 – 여를왕 – 대주류왕 – 애루왕 – 중해왕 – 유리명왕으로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위 계승을 아들로 이었을 경우이고, 형제 왕위 상승이 많았던 고구려의 왕위 계보도를 보면 5대 5왕 이외에 더 많은 왕들이 누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북의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한 남북의 차이를 이해하면 당연히 고구려에서 갈려 나온 백제에 대한 건국연대도 새롭게 조정해야 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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