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통일국가를 세운 왕건 

안광획

(사진: 개성 왕건왕릉(헌릉)에 모셔진 왕건 영정과 북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왕건 동상.)


(사진: 개성 왕건왕릉(헌릉). 『조선중앙통신』)

왕건(王建)은 발해유민들과 그 남부지역의 일부 그리고 후기신라말기에 생겨난 후삼국을 통일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를 세운 시조왕이다.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고려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왕건(877~943년)의 자는 약천이며 아버지는 용건(龍建, 후에 왕륭으로 고침),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그의 먼 조상은 백두산 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었고 이마의 뼈는 둥글고 턱은 모나며 얼굴이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뛰어나고 음성이 웅장하였으며 세상을 건질 도량이 있었다고 한다.

왕건의 나이 17살이 되였을 때 동리산(洞里山)*에 있는 후기신라의 유명한 중인 도선(道詵)이 찾아왔다. 그는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나서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바라보아 감통보우(感通保佑)**하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 동리산: 전라남도 곡성군에 위치한 산. 일명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한다. 산에는 유명한 절인 태안사(泰安寺)가 있다. 해발 753m.
* 감통보우: 소위 천시, 지리 등 초인간적 신비력을 통해서 사람의 사업을 돕는다는 것.

후기신라 말기 봉건적 착취와 신분적 억압이 증대되고 통치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곳곳에서 인민들이 투쟁에 궐기하고 그 기회를 타서 정치적 야심가들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견훤(甄萱)은 옛 백제 땅을 차지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弓裔)는 옛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차지하고 901년에 고려(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후기신라의 영역안에는 3개의 봉건국가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역사에서의 ‘후삼국’이다.

894~895년 사이에 궁예가 세력을 확장하고 ‘군(君, 임금)’을 자칭하던 때에 송악군(松嶽郡, 개성)의 사찬으로 있던 왕륭이 왕건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기뻐하며 금성(金城)* 태수로 삼았다.

* 강원도 철원군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왕륭은 궁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만약에 조선, 숙신, 변한지역에서 임금 노릇을 하려면 먼저 송악(개성)에 성을 쌓고 신의 맏아들(왕건)을 그 성주로 삼는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궁예는 왕륭의 말을 좇았다. 철원은 사면이 막히고 지형이 험하기는 하지만 강이 없어서 운수가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 대신 송악군(개성)은 오늘의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송악의 남쪽에 발어참성(拔禦塹城)을 쌓게 하고 이어 그를 성주로 삼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었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 생애가 시작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장수가 되여 후백제 견훤과의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해전에 능한 수군장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왕건은 궁예의 정권에서 계속 벼슬이 올라 913년에는 파진찬으로 관등이 높아지고 시중이 되여 지위가 백관의 우두머리로 되었다.

918년 6월 14일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다음날에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하였다. 그 이후 왕건의 군사 활동은 성공과 실패가 엇바뀌었다. 왕건은 용맹하고 군사적 재능이 있는 견훤에게 빈번히 패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934년은 왕건에게 있어서 통일로의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마련된 해였다. 그해 7월 발해국의 마지막 임금 대인선(大諲譔)이 거란의 도읍에 끌려간 조건에서 발해국을 대표하는 임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관료, 군인,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화하여 왔다.

그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왕건은 934년 9월 20일 운주(雲州)* 싸움에서 견훤을 크게 격파하고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후백제의 웅진(공주) 이북 30여성이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더 큰 기쁨은 뒤에 있었다.

* 오늘날 충청남도 홍성군.

935년 3월에 왕건을 몹시도 괴롭히던 용장 견훤이 후계자 문제를 잘못 처리한 것으로 하여 아들들에게 밀려났다가  6월에 고려로 투항해온 것이다. 왕건은 너무 기뻐 환영식을 요란하게 벌려놓고 견훤을 맞이하였으며 그를 상부(尙父, 웃어른)라고 부르고 그의 품계를 백관의 위에 있게 하였다. 11월에는 신라왕 김부(金傅, 경순왕)가 대세의 흐름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936년 9월에 후백제에 대한 마지막 공격작전(일리천 전투)을 벌려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후삼국만이 아니라 발해까지도 포섭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첫 통일국가의 군주로 된 그의 기쁨은 그해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게 된 동기에 역력히 비껴 있다.

* 개태사: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사찰.

기록에 의하면  936년에 왕건은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겨 차지하고 하내 30여군과 발해국사람들이 모두 귀순하니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개태사를 짓게 하고 직접 발원하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절간이 있는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고 하고 절 이름은 ‘개태(開泰)’라고 짓게 하였는데 부처님의 위력으로 비호를 받고 하늘의 힘으로 부지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천호산에는 왕건의 진전(화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즉, 왕건은 나라를 통일하여 그 군주가 된 기쁨과 그 나라가 부처님과 하느님의 힘과 위력으로 오래 부강하기를 바라 이 절간을 세웠다는 것이다.

생의 절반이상을 전장에서 흘려보낸 왕건.

자기의 피와 땀으로 또 수많은 명신, 명장들과 백성들의 피의 대가로 이루어진 민족의 번영의 기초였기에 그처럼 그는 통일을 기뻐하며 영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으리라.

그러면 어떻게 되여 왕건은 강대한 적수들을 꺾고 승리하여 국토의 통일이라는 거창한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가? 한마디로 그의 성공의 비결은 정치군사전략을 잘 세우고 그것을 일관하게 관철한데 있다.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의 자리에 들어앉은 후 왕건은 자기의 정치군사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의 총적인 전략적 목표는 강대한 통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실현하는데서 무엇보다도 평양을 중시하였다. 918년 6월에 집권한 왕건은 석달 후인 9월 26일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평양 옛 도읍이 황폐화된지는 비록 오래지만 고적은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번인(여진인)들이 거기서 수렵을 하고 있으며, 또 수렵을 계기로 변방고을들을 침략하여 피해가 크다. 마땅히 백성들을 옮겨서 살게 함으로써 국가의 변방을 공고히 하여 백세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평양은 원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제후국인 ‘고려후국(高麗侯國)’의 관할 하에 있었다. 발해말기 혼란된 정치정세 속에서 평양과 그 주변지역들에서 연속 일어나는 인민들의 반봉건적진출로 하여 ‘고려후국’의 통치권은 평양 일대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왕건은 역사적으로 평양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회복함으로써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국가로서의 명분을 밝히며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왕건은 평양을 대도호부로 하고 사촌동생 왕식렴(王式廉)으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왕건은 평양을 서경(西京, 서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부르면서 거의 해마다 어떤 해에는 두 차례씩 순행하였다. 그리고 탑과 종묘의 초상들 가운데 훼손된 것을 전부 수복하게 하고, 성을 쌓으며 여러 군현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조치들도 취하였다.

926년 북방에 있던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존재를 끝마친 후 왕건의 북방중시정책은 더욱 적극화 되었다. 932년 5월 왕건은 자기가 그토록 평양을 중시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최근에 서경을 복구하고 백성을 옮기며 그곳을 충실히 한 것은 그 지방 지력에 의거하여 삼한을 평정하고 수도를 장차 여기에 두려 해서이다.”

왕건은 서경건설과 함께 대동강 이북 지역에 성을 쌓기 위한 사업을 함께 밀고 나갔다. 거란에 의하여 빼앗긴 옛 고구려, 발해의 땅까지도 포함하여 강대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그의 전략은 성공하였다. 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찾아왔는데 기록에 의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고려에로 찾아들어왔다.’고 한다.

평양을 중시한 왕건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고도 할수 있는 「훈요 10조」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어 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것이다.”라고 밝혔던 것이다.

후에 고려 26대 임금인 충선왕(忠宣王)은 ‘태조 왕건이 여러 차례 서도(평양)에 행차하고 북변을 직접 순시한 뜻은 동명(東明, 동명성왕)의 옛 땅을 자기 집안의 옛 물건처럼 여기고 반드시 차지하려고 한 것이니 이를 어찌 닭이나 잡고 오리나 옭으려는데 그치려고 한 것이었겠는가’고 하였다.

충선왕의 이 말은 태조 왕건이 신라(닭)에서 일어난 후삼국을 통일하고 영토를 압록강(오리)까지 넓히려는 데만이 아니라 고구려 동명왕이 세우고 발해가 이었던 조상 전래의 땅을 대대로 전해오는 ‘옛 물건’처럼 여기고 반드시 되찾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정확한 전략적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기에 그는 발해태자 대광현에게서 주권을 이양 받고 많은 발해주민들까지 포섭함으로써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까지도 포함한 첫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왕건은 선견지명있는 전략을 세우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일관성 있게 그것을 관철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통일을 실현하고 민족사에 뚜렷이 자기 이름을 남겼다.

원문: 림호성, 『단군민족의 명인들』 1, 단군민족통일협의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