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2)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현재적 의미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단양 금굴 유적
우리 역사 여행의 출발점은 한반도 구석기 시대이다. 이 시대는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 한국인들과의 혈연적 인류학적 관계와 한반도 문명 탄생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의미를 밝혀야 한다. 지금 수많은 구석기 유적·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쌓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현재적 의미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과 오늘날 한국인들과의 혈연적 연관성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혈연적 연관성이 없다면 당연히 문화적 계승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가?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자기 나라 후기 구석기-중석기-신석기 시대 주민의 계승성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자기 민족의 기원을 찾고 있다. 그리고 이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자기 민족의 기원을 자기 땅 안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만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기원을 한반도 밖에서 찾으려는 헛된 노력들을 무수히 경주해 왔다. 우리 민족은 토착 한반도 사람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 이후 그 언젠가 한반도 밖 그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온 외래인(이주민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를 찾기 위해 모질음을 쓰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다.
일제 관변 역사학자들은 왜 한반도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부정했나?
인터넷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은 어디인가요?”를 치면 공주 석장리 유적이라고 나온다.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한반도에도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이 처음 발굴된 것은 이보다 30년 앞선 1933년경이다. 당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리에서 철도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고, 1934년 일본인인 모리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런데 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이라고 알려졌을까? 일제 관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동관리 구석기 유적을 깡그리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일제 관변학자들은 당시까지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것을 핑계로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지경이었고, 기원전 2000년경 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석기 토기 문화를 갖고 있던 집단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비로소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은 한반도가 원고향이 아니라, 외부에서 흘러 들어와 사는 이주민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 민족의 원 고향은 퉁구스라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청동기 문화를 가진 퉁구스족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그 이전에 살고 있던 빗살무늬 토기인들을 몰아내고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방과 남방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섞여 만들어졌다는 ‘혼혈기원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기원문제가 의도적으로 왜곡되면서, 이른바 외래 기원론이 자리 잡았다. 그럼 일제 관변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조선민족 열등설을 퍼뜨려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속셈이었다. 누구보다도 조상숭배 관념이 깊고 민족적 자긍심이 높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정신을 말살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왜곡시켜 놓아야 했다. 우리 민족을 어디서 흘러들어온지도 모르는 근본도 뿌리도 없는 민족으로 만들어 민족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민족적 열등의식을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열도와 한반도에서 모두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는데도 유독 우리 민족만을 가리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주민집단이라는 설을 조작해 냈던 것을 어찌 의도적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단계 주민교체설’로 진화한 우리민족의 기원문제
일제 강점기에는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유입론과 주민교체설이 퍼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64년을 전후해 남과 북에서 각각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수백 군데 이상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한 10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부터 중기 구석기 유적, 후기 구석기 유적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 외부유입론과 주민교체설은 마땅히 파산됐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우리 민족 외부기원론의 틀에서 한발 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 외부기원론은 한반도 ‘주민 2단계 교체설’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구석기 유적이 다수 발굴된 조건에서 어떻게 외부기원론이 사라지지 않고 진화할 수 있었을까? 주민 2단계 교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긴 했지만, 빙하기가 끝나면서 어디론가 흩어져 가고, 한반도에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으로 바뀌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근거로 내세웠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가 하고 묻자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1만 년 전에 끝났는데,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에 시작되었으므로, 7000년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신석기 문화를 개척한 주체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 기원전 3000년경 시베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들이 한반도에 신석기 문화를 갖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 문화를 소유한 퉁구스인들이 한반도에 밀려들어 고아시아족들을 밀어내고 한반도에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오늘날 한반도인들의 직접적 조상으로 된다는 것이 바로 2단계 주민교체설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지난 2004년 11월25일 문화일보에 기고한 “청동기주역 ‘퉁구스 예맥족’이 기원”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됩니다”라고 썼다. 우리의 선조들이 양키들처럼 인종청소를 하고 이 땅에 정착했다는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다.
▲ 상원 검은모루 유적
파산된 2단계 주민교체설
한반도 주민 2단계 교체설을 비롯한 다양한 외부기원론은 오로지 주관적 추측과 일방적 주장에 불과할 뿐 아무런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의 인류학과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통해 외부기원론이 제기한 대부분의 가정과 전제들이 실증적으로 명백히 부정되었다.
2단계 주민교체론의 핵심전제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시작이 기원전 3000년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출발 연대는 발굴된 신석기 시대 유적에 의거하면 기원전 3000년경이 아니라 기원전 8000년경에서 1만년 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반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시간적 공백은 사라졌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시작이 시베리아 신석기 시대의 시작보다 연대가 더 빠르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므로 시베리아 고아시아족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이제 설자리가 없다.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의 경우에는 신석기 시대의 상징인 토기와 함께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함께 출토됨으로써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토기를 발명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개척했다는 것이 유물로 확증되었다.
청동기 문화를 소유한 퉁구스 계열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신석기 주민들을 몰아내고 현대 한반도인들의 직접적 조상으로 되었다는 주장 역시 허물어졌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스키타이(퉁구스)계열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이 유적 유물로 밝혀졌다. 스키타이 청동기 문화는 기껏해야 기원전 12~13세기를 넘지 못하는데,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출발은 우리 학계에서 기원전 20세기 또는 기원전 15세기로 편년됨으로써 스키타이 청동기 보다 앞섰다. 더욱이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다른 지역의 청동기와는 문화 종태가 매우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이 서로 다른 주민이라는 주장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는 주민집단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문화의 변화와 발전을 의미한다.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의미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는 밝혀진 유적 유물로 볼 때 1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은 세계에서 몇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반도를 인류 발상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10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은 상원 검은모루 유적이다. 한반도 전기 구석기 유적은 이외에도 단양 금굴 유적(70만 년 전), 평남 순천 동암동 유적(88만 년 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 구석기 유적뿐만 아니라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구석기 유적들이 체계적으로 발굴되고 있으며, 수적으로도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 이상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로써 구석기 시대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 뼈 화석도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화대사람(30만 년 전), 역포사람(10만 년 전), 덕천사람(10만 년 전), 용곡사람(5만 년 전), 승리산사람(4~5만 년 전), 홍수아이(3~4만 년 전), 만달사람(1만5천 년 전) 등 3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 초기 화석에서부터 1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 후기를 거쳐 4~5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1만5천 년 전 중석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화석들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이것은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혈연적 계승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인류 화석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들 사이의 인류학적 계승성이 확고히 밝혀졌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 고산리 유적 등을 통해 한반도 후기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연결고리도 밝혀졌다. 우리나라도 일본 중국처럼 후기 구석기–중석기–신석기 시대의 주민계승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 역포 사람 ▲ 승리산 사람 ▲ 만달 사람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밖으로부터 찾으려는 외래유입설은 앞에서 서술한 바대로 이미 파산했다. 그렇다면 이제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 민족의 기원을 자기 나라에서 찾으려는 것은 상식이며, 정상적인 사고이다.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그 어떤 외부로부터 이주한 이주민이 아니라, 한반도 구석기 문화를 창조했던 사람들의 직계 후손들이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외부에서 유입된 이주민들에 의해 이식된 문화가 아니라 한반도 후기 구석기인들에 의해 창조된 독창적인 토착 문화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문명 탄생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한반도 구석기 시대에 도달한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원 고향으로 하는 토착민들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한반도의 유구한 구석기 시대 역사와 문화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한반도 구석기 문화는 우리 민족에게 인류학적 문화적으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 195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77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수학했다.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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