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시기 창가, ‘대조선 자주독립 애국가’

김지호

19C말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지식인들에 의해 창가가 널리 창작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창가는 발생 초기부터 감화력을 가지고 청소년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 속에 널리 불려졌다.
창가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파급된 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렬해진 근대적 발전과 독립에 대한 민중의 절실한 지향과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1894년 부르주아 개혁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민중 속에는 근대화를 빨리 추진하고자하는 지향이 이전과 비할 바 없이 강렬해졌으며, 독립을 이룩해보려는 열망도 한층 더 높아갔다. 당시 우리 민중의 이러한 지향은 근대화에 대한 의욕과 열정, 독립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창가의 창작보급을 필요로 하였다.
창가가 널리 창작 보급될 수 있었던 다른 하나의 요인은 대중계몽을 빨리 해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데 있다.
창가는 성별과 나이, 직업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쉽게 부를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었으므로 광범한 군중 속에 빨리 파급되어 나갈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지식인들은 창가의 이러한 특성을 간파하고 대중계몽을 빨리 전개해나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으며 창가의 창작보급에 큰 의의를 부여하였다.

19C말~20C초에 지식인들에 의해 창작보급된 대표적인 창가 작품으로는 ‘독립가’, ‘애국가’, ‘동심가’, ‘신문가’, ‘세계일주가’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무엇보다 독립을 지향한 애국주의 주제의 작품을 많이 창작보급하였다.
1896년에 독립신문이 간행된 후 이 신문과 기타 출판물에 이필균의 ‘대조선 자주독립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김석하의 ‘독립문가’, 윤태성의 ‘애국가’, 최영구의 ‘애국독립가’를 비롯한 많은 창가가 실렸는데. 이것은 당시 독립을 지키려는 시대적 기운을 반영하여 창가 작품이 얼마나 적극 호응해 나섰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에서 한결같은 지향은 독립을 이룩하려는데 있으며 애국의 열정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필균이 창작한 ‘대조선 자주독립 애국가’를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에 대조선아 / 자주독립 분명하다
분골하고 쇄신토록 / 충군하고 애국하세

깊은 잠을 어서 깨여 / 부국강병 진보하세
합심하고 일심되여 / 서세동점 막아보세

남녀없이 입학하여 / 세계학식 배워보자
팔괘 국기 높이 달아 / 육대주에 횡행하세

에댜데야 애국하세 / 나라 위해 죽어보세
우리 정부 높여주고 / 우리 군면 도와주세

남의 천대 받게 되니 / 후회막급 없이 하세
사농공상 진력하여 / 사람마다 자유하세

교육해야 개화되고 / 개화해야 사람되네
산이 높고 물이 깊게 / 우리 마음 맹세하세

이 창가에서는 당시 날로 심화되어가던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고 독립과 자유를 이룩할 것을 열렬히 호소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 민중이 합심하며, 문명개화와 근대화를 실현하는 데 애국의 한 마음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대조선 자주독립 애국가’에는 봉건적인 충군사상을 설교하는 등의 한계도 분명하였으나 애국의 열정이 넘치는 이 작품은 민중 속에 민족의식, 독립정신을 심어주는데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노래는 2005년 보훈처에서 제작배포한 독립가 음반에 럼블피쉬가 편곡하여 실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