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2호 현재 평양시 대성산 기슭에 터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옛 왕궁이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에 축조되었으며, 평원왕 시기인 586년 현재 평양의 중심부에 세워진 장안성으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149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 안학궁은 1958년부터 발굴이 이루어져 그 거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한 변의 길이 622m의 서쪽으로 약간 비스듬한 사각형 토성과 해자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안의 부지 면적은 38만m²에 달한다. 부지에서는 무려 3,240개의 주춧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총 52채의 건물들이 5개의 군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적인 큰 행사를 하던 남궁, 왕이 일상적으로 정사를 보던 중궁, 왕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던 북궁, 왕위를 이을 태자가 살던 동궁, 궁전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이 살던 서궁을 중심으로 한 궁전들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궁성의 부지는 북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며, 지형을 따라 건물군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곧 뒤로 갈수록 건물들이 높아 보이는 효과를 내며 웅장함을 강조하였다. 건물들을 이어주는 회랑은 뒤로 들어갈수록 점차 좁아져 궁성을 실제보다 더욱 깊어 보이게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어 당시 건물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출토된 치미기와와 주춧돌들을 통해 그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지붕 위에 장식되는 치미기와는 안학궁터 출토품이 높이 2.1m로서, 높이 1.86m인 신라 최대규모 사찰인 황룡사지 출토 치미기와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한다. 주춧돌들을 통해 측정한 안학궁의 중궁 1호 궁전의 전면 길이는 87m, 측면 길이는 27m이다. 이는 전면과...
역문협 2021.03.05 1 조회 980 | 지역: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궁전 | 종목:
대성산일대는 고구려의 돌각담무덤(적석총)들과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들이 천여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 특히 4~5기 또는 5~6기가 한줄 또는 두줄로 나란히 떼를 이루고 있는데, 북한측에서는 이를 두고 무덤에 묻힌 자들이 친연관계가 있으며, 무덤떼들이 하나의 가족공동묘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수많은 무덤떼들은 고구려가 평양지방에 진출한 3세기경부터 7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었으며, 그 주변으로 대성산성을 비롯하여 안학궁터 및 청암동 토성 등 수 많은 중요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대성산일대에서는 소문봉과 장수봉 남쪽의 돌각담무덤이 알려져 있다. 이 중 소문봉 남쪽의 무덤들은 비교적 큰 돌로 기단을 여러 단 쌓고 그 위에 막돌로 무덤무지를 만들어 그 안에 주검곽을 만든 ‘기단돌각담무덤(기단식적석총)’이라고 보고되었다. 총 7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이 무덤떼는 지금까지 평양시 일대에 알려진 무덤떼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평균적으로 길이 약 10m 내외의 축대, 한 변의 길이 약 8m 내외에 높이는 약 0.6m 내외인 기단들과 장축 약 170~250m, 너비 약 60~105cm의 주검곽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들 중 5호와 6호 무덤에서 철제 관못이 각각 1개씩 출토되었으며, 형태는 각각 버섯의 갓 모양 대가리형, 대가리부분이 구부러진 ㄱ자형이다. 이 외의 무덤들에서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이정훈) <참고문헌>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강좌, 1973, 『대성산의 고구려 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조선고고학전서29』 (중세편 6), 진인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어: 대성산고구려고분군 (http://encykorea.aks.ac.kr) 소문봉 3호 무덤 Ⓒ 『조선고고학전서29』 (중세편 6) 소문봉 4호무덤 Ⓒ 『조선고고학전서29』 (중세편 6)
역문협 2021.03.05 0 조회 474 | 지역: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상오리절터 (上五里寺址) ▷위치 :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청호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절터 상오리절터는 대성구역 청호동에 소재하며 평양 시내로부터 약 10km 정도 대동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문헌에서 고구려 최초의 사찰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삼국사기』에 따르면 순도와 아도를 통해서 불교경전과 불상을 받아들이고,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해 불교수용과 보급에 힘썼다. 불교 사원이 평양에 세워진 것은 광개토왕 2년(393)에 9사를 평양에 창건했다는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까지 평양에서 고구려의 불교사원으로 보고된 예는 청암리사지, 원오리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토성리사지가 있으나 이외의 지역에서 보고된 사례는 없다. 이 중 상오리절터의 경우 원래 상호리절터를 찾기 위해서 대동군 임원면 상호리를 탐문했는데, 상호리라는 지명이 없었으므로 대신 임원면 상오리 부근에서 절터로 추정되는 유적을 찾아내어 1939년에 발굴 조사를 하게 되었다. 발굴을 통해서 알려진 상오리절터의 중심에는 한 변 8m 정도의 8각탑지가 동서로 4m 떨어진 장방형 건물지의 초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건물지는 동서로 약 12m, 남북으로 약 25m 규모로 8각탑지와 연결되어 있다. 8각탑지와 금당지는 통로로 이용되었던 보도부분과 계단으로 추정되는 유구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1탑 3금당식의 배치 구성을 보인다.  지금까지 남겨진 발굴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당시 발굴을 추진했던 고이즈미 아키오의 회고록만 전해지면서 정확한 발굴상황을 알기 어렵다. 상오리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은 금동으로 당초문이 장식된 유물과 수막새 20여 점, ‘東’이 새겨진 암키와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에는 금귀걸이 사진이 있는데 상오리절터 출토품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유리건판에는...
역문협 2020.08.17 0 조회 1323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사찰관련유적 | 종목: 일반문화유물
부벽루 (浮碧樓) ▷위치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건축물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7호 부벽루는 평양성의 북쪽에 위치한 북성의 남문인 전금문으로부터 언덕 위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부벽루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평양8경에 포함되었으며 조선시대 3대 누정으로도 손꼽힌다. 고려시대의 문신인 김황원은 대동강 건너로 보이는 넓은 들판과 크고 작은 산이 펼쳐지는 전경이 아름다워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긴 성벽 한편으로는 강물이 넘쳐흐르고 넓은 뜰 동쪽으로는 한점한점이 산이로다.”라는 시를 읊고는 더 이상 시상이 떠올려지지 않아서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벽루의 유래는 영명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영명사는 393년(광개토왕 2년)에 평양에 세운 9개의 사찰 중 하나로 전해진다. 영명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확정하기 어려우나 절터에서 수습되는 주춧돌과 기와를 통해서 고구려시대에 창건된 절로 볼 수도 있다. 부벽루는 영명사의 부속 누정 건물로 영명루라고 부르다가 12세기 초(고려 예종 대)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벽루는 정면 5칸(14.5m), 측면 3칸(7.6m), 총 116㎡의 면적을 가진 비교적 큰 규모의 누정 건물이다. 건물 안은 통천장으로 시원하게 트여있으며, 바닥에는 마루 대신에 잘 정면한 박석을 깔아서 한층 정갈하게 보인다. 부벽루의 초축 연대는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과 돌계단이 있어 고구려시대로 보기도 한다.  지금의 부벽루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선조 25년)에 전투지휘처로서 역할을 하였는데 화재로 전소되어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건되었다. 그 후에도 1773년(영조 49년)과...
역문협 2020.08.17 0 조회 1044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누정 | 종목: 국보문화유물
보통문 (普通門) ▷위치 : 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문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건축물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호 보통문은 앞에 흐르는 보통강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1960년대 시가지 구획 정책에 따라 보통문을 원래의 위치에서 100m가량 동쪽으로 이설하여 현재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등 평양 중심 시가지 내 위치한다. 보통문이 위치한 평양성은 평원왕 28년(586)에 완공하면서, 장수왕의 평양천도(427) 이래로 재차 천도하였다. 평양성의 구조는 기능과 역할에 따라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복합식 성곽의 성격을 띤다. 북성은 북단에 자리하며 궁성이 있는 내성을 보호하였고, 중성은 행정기구가 위치하였으며, 외성은 일반 백성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보통문은 중성의 서쪽에 위치하는 성문으로 평안북도 의주로 통하던 관문으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과거에는 보통문을 두고 ‘평양8경’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보통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어 보통문 밖은 항상 번화하였는데,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우양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아침 해가 보통문을 비추면 앞으로 넓게 트인 벌판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어 해를 다시 보게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보통문은 화강석을 네모나게 다듬어 쌓았다. 정면에는 무지개 형태의 성문을 높이 5.1m, 너비 4.5m 크기로 쌓고 그 위에 다락건물을 세워 전체적으로 2층 형태를 띠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의 규모를 가진 건물로 축조하였다.  보통문을 고쳐 지은 것은 1473년(조선 성종 4년)으로 양란 이후에도 몇 차례 보수를 하였다. 그 후 근‧현대 들어서 6.25전쟁의 심한 피해로 인해 정전 직후에 대보수를 진행하였다. 보통문 시대의...
역문협 2020.08.17 0 조회 1280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성곽.관방유적 | 종목: 국보문화유물
로산동고구려무덤 (魯山洞高句麗古墳) ▷위치 :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장수원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무덤   로산동고구려무덤은 삼석구역 장수원동에 소재하며 장수원동은 로산리와 토포리가 합쳐지면서 생겨났다. 로산동일대의 무덤떼를 편의상 로산동무덤떼이라 한다.    로산동에는 돌로 방을 만든 다음 흙으로 덮어서 만든 6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로산동에서 1988년에 처음으로 발굴한 무덤을 로산동 1호 무덤이라고 하며, 발굴조사 당시 천장이 무너져서 묘실에는 흙과 돌이 차 있었을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이 무덤은 현실 벽에 벽화가 남아있는 벽화고분이다.    무덤의 구조는 추가장이 가능하도록 내부에 복도가 있는데 이를 안길이라고 하며 보통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안길을 따라 들어가면 시신을 안치하는 주검칸이 나오는데, 추가장이 가능하므로 보통 2대의 시신을 놓는 관대가 설치되어 있다.    벽화는 벽에 회칠을 하고서 그렸는데 현재는 박락현상으로 훼손상태가 심각하다. 벽화는 동‧서‧남‧북에 모두 남겼으며, 동벽에는 날개를 편 주작을 그렸는데 현재는 두다리와 몸통아래 부분만 남아있다. 서벽에는 거북이를 세 번 감은 형상의 현무를 검은색으로 그린 후 노란색으로 덧칠한 것이 남아있다. 남벽에는 백호 몸통 부분만 남아 있고, 북벽에는 청룡을 그렸는데 현재는 검은선만 남아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무덤의 연대를 구조와 사신도의 회화수법에 따라 3세기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로산동 2·3·4호 무덤은 로산동1호무덤과 동일한 구조로 축조되었다. 무덤의 천장구조는 긴 장대석을 4방면에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1단으로 장대석을 쌓아 천장의 빈 공간을 점차 좁혀가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로산동2호무덤의 천장구조도 동일하다. 로산동3호무덤의 천장은 파괴되었으나 북벽에 남아있는 구조로 보아 2호 무덤과 비슷해보인다. 출토유물은...
역문협 2020.08.17 0 조회 714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분모유적 | 종목: 준국보문화유물(보존급)
동산동 벽화무덤 (東山洞 壁畵古墳) ▷위치 :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무덤 동산동 벽화무덤은 2009년 10월 건설공사 중 발견되어 이듬해 일본과 북한의 공동 학술조사를 통해 발굴되었다. 락랑구역에서는 드물게 확인되는 고구려 벽화무덤이자 북한 내 첫 청자 촛대가 출토되어 큰 관심을 받았다. 더불어 고구려 벽화무덤 가운데서도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구조형식이 독특한 무덤이다.   락랑구역 중 비교적 높은 동산(39.1m)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벗어난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 동산동 벽화무덤의 벽화는 본래 천정과 벽면 전체에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벽화가 훼손되고 석수가 흘러내리는 등 현재는 벽화 내용을 온전히 확인하기 어렵다. 확인 가능한 내용으로는 무덤 안길 양 벽의 행렬도와 앞칸 북벽의 붉은색 기둥, 사이길의 문지기 장수, 안칸 기둥의 여러 무늬들이 있다. 그 중 행렬도의 내용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데, 무덤 안쪽을 향하고 있으며 3단으로 구분된다. 수십 명 정도의 행렬 인원으로 추정되며 동벽의 행렬구성은 개마무사-창수-기수 등의 여러 병종으로 되어 있다. 벽면의 위쪽에는 4필의 말과 5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안길 서벽에는 수레바퀴와 뒤에 뿔이 솟은 것 같은 문관모를  쓴 인물의 얼굴이 그가 타고 있는 말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인물의 눈과 콧수염 그리고 말갈기가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외 안칸과 앞칸 등 다른 부분은 어렴풋한 무늬의 윤곽 정도만 확인되고 정확한 형태와 내용은 알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행렬도를 주제로 한 벽화고분은 4세기 말에서...
역문협 2020.08.17 -1 조회 810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분모유적 | 종목: 국보문화유물
동명왕릉 부근의 무덤 (東明王陵 附近 墓群)-진파리 1호분 (眞坡里 一號墳) ▷위치 :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무덤 ▷지정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81호 (전)동명왕릉 부근에는 20여기의 무덤들이 마치 (전)동명왕릉을 호위하듯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는 (전)동명왕릉을 포함하여 3기의 벽화무덤이 있는데, 진파리 1호분의 벽화는 이례적인 사신도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진파리 1호분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북한의 국보급 제18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진파리 1호분이 속한 동명왕릉고분군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진파리 1호분 또한 그 대상은 같지만 서로 다른 명칭이 난재하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 9호분’이라 부른다. 남한에서는 진파리 1호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무덤은 1941년 일본 군인에 의해 발견되어 고분벽화 모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에 북한 학자들이 전면 재조사하였다. 당시에는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에 속해있어 조사한 10기에 대해 (전)동명왕릉을 포함하여 진파리 고분군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행정구역이 력포구역 무진리로 바뀌어 무진리 고분군으로 불리다가 (전)동명왕릉을 개건하면서 무진리에서 룡산리로 바뀌었고, 무덤군의 이름은 동명왕릉고분군이 되었다. 즉 진파리와 무진리, 룡산리는 모두 같은 지명이다.  진파리 1호분은 동명왕릉의 북쪽 200m지점의 고분군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에 천체도를 배합한 양상인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신 중 청룡과 백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보통 무덤칸의 문쪽을 향하고 있는 다른 사신도의 벽화와는 달리, 진파리 1호분의 청룡과 백호는 북벽을 향한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진파리 1호분의 벽화에는 널길...
역문협 2020.08.17 0 조회 1034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분모유적 | 종목: 국보문화유물
동명왕릉 (東明王陵) ▷위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무덤 ▷구분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6호 동명왕릉은 고구려 고분 수 십 여기가 있는 평양의 진파리 고분군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즉 고주몽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북에서는 국보급 제36호로 지정, 200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74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1993년 동명성왕의 음력생일(4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 14일에 현재의 웅장한 규모로 새로 개건하였다. 개건 당시 김일성 주석은 동명왕릉을 현지지도하며 지난 세월 비바람에 깎인 높이를 기후변화에 맞춰 계산하도록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기존 9m 정도의 봉분 높이가 현재는 11m가 되었다. 북 학계에서는 동명왕릉에 대해 복원이 아닌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 세운 ‘개건(改建)’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명왕릉이 개건되면서,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등 고구려 건국에 일조한 공신들의 문무석인상과 석마들도 세워졌다. 또한 제사를 위한 제당과 릉문, 그리고 고구려 시조를 기리는 비석과 김일성 주석의 친필이 적힌 개건기념비문도 세워졌다. 1974년의 발굴 전까지 동명왕릉은 벽화나 왕릉급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왕릉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1974년 본격적인 발굴 이후,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벽화가 등장했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과 같이 붉은색 옷을 입은 인물이 그려진 벽화였다. 붉은색의 옷은 왕급을 상징하기에 왕릉의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었다. 또한 벽면과 천장에 연꽃무늬를 격자모양으로 그려 장식하였는데, 장식된 연꽃의 입체감이 뛰어나며 복원된 연꽃은 약 641개나 된다. 이러한 벽화 장식은 특수한 양식이라 주목된다. 발굴을 통해 왕릉급 유물도 수습되었는데,...
역문협 2020.08.17 0 조회 1080 | 지역: 평양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분모유적 | 종목: 국보문화유물
대성동 무덤떼 (大城洞 古墳群) ▷위치 :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성격 : 무덤   대성동 무덤떼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의해 2009년 10월말부터 11월 중순까지 발굴되었다. 약 1㎢의 면적으로, 대성산성 북장대에서 남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다양한 구조를 가진 약 30여기의 대성동 무덤떼는 크게 수혈식과 횡혈식의 석실봉토분으로 나눌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금속공예품과 철제품(관못, 관고리 등), 기와조각, 벽돌과 인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성동 무덤떼 가운데 대성동 34호무덤은 고리자루칼과 장식품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34호무덤은 서쪽 구릉지대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성동 무덤떼에서 유일하게 벽화가 있는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이다. 34호무덤에서 출토된 2점의 고리자루칼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칼이며 고리 안에 세잎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전까지 이러한 세잎무늬 장식이 새겨진 칼은 5세기 중엽~6세기 초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만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4세기경의 무덤형식인 대성동 34호무덤에서 고리자루칼 장식품이 출토됨으로써 신라나 가야보다 매우 이른 시기에 쓰인 칼장식품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수준이 신라와 가야에 영향을 끼쳤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마도 고구려의 남방 진출 과정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용이 불가능한 순수 장식용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대성동 34호무덤은 주검칸(현실)과 무덤길(연도)로 이루어진 단칸구조이며, 무덤길이 남벽의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구조로 대체로 4세기경에 쓰인 무덤형식으로 파악된다. 부분적이지만 붉은색, 푸른색 등 여러 가지 색깔로 그린 벽화의 흔적도 확인되어 주목할 만하다. 대성동 7호무덤에서는 연꽃넝쿨무늬가 새겨진 금귀걸이가 출토되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금귀걸이의 공예적 가치에 비해 무덤 주인공의 계급은 높지 않다. 이에 대해...
역문협 2020.08.17 0 조회 648 | 지역: 평양특별시 | 시대: 고구려 | 유형: 분모유적 | 종목: 국보문화유물

정회원이 되세요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