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중구역 역전동 평양역구내에서 발견된 평양역구내무덤은 ‘평양역구내전실묘’ 혹은 ‘영화9년명 동리묘’라고도 불린다. 벽돌무덤에 속하는 평양역구내무덤의 구조 형식은 벽돌로 바닥과 벽체, 천장을 축조하는 일반적인 벽돌무덤과 달리 벽체 아랫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또 벽체 윗부분과 천장부분은 돌로 쌓았으며 무덤에는 석회를 사용했다. 평면구조상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친 외칸무덤에 크기는 동서 약 2m, 남북 약 3.1m 정도다. 이러한 무덤 형식은 낙랑국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고구려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덤의 특이한 점은 무덤칸을 축조한 벽돌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다는 것이다. 글은 벽돌의 측면에 양각으로 《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영화구년삼월십일요동한현도태수령동리조)》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영화9년 3월 10일 요동·한·현도를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라는 의미이며 영화는 중국 동진의 제나라 때 사용한 연호로, 영화 9년은 서기 353년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무덤이 조성된 연대와 만든 사람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동리의 관직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직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동리가 한인 출신의 수공업자들을 거느린 일정한 지위를 가진 책임자로서 3개 군의 태수라는 허직으로 자신을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평양역구내무덤의 주인공을 추정해보자면, 이전 낙랑국의 출신으로서 고구려 귀족대열에 완전히 편입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죽은 후에 자식들이 그 출신을 고려하여, 이전 낙랑국의 무덤축조에 경험이 있는 동리로 하여금 부모의 무덤을 고구려의 무덤형식과 결합된 형식으로 짓게 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정슬주) <참고문헌> 리광희, 2013, 「평양역구내무덤의 주인공문제에 대한 검토」, 『력사과학』2013-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강현숙,...
역문협 2021.03.18 0 조회 672 | 지역: 평양시 중구역 역전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1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있는 현무문은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우고 1714년(조선 숙종 40년)에 다시 세운 평양성 북성의 정북문이다. 현무문이라는 이름은 ‘사방위신수(四方位神獸)’에서 북방 수호를 상징하는 ‘현무(玄武)’에서 따온 것으로, 현무문은 모란봉과 을밀봉 사이에 있는 평양성 북쪽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성문의 밑부분은 양쪽 성벽을 조금 어긋나게 쌓았고, 그 사이에 성문을 모로 놓았으며 바깥쪽 성벽을 돌출시켜 옹성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는 고구려 성문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무문은 6·25전쟁 시기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문화보존정책에 의하여 원상태로 보수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까지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홍예문은 홍예축대를 3.3m 높이로 쌓고 그 위에 합각지붕에 3칸 외통막걸기식 건물을 세웠는데 그 앞면 길이는 7.05m이며 옆면 길이는 3.1m이다. 홍예 내부 통로는 천장 높이가 2.3m이며 벽면과 더불어 천장까지 곱게 다듬은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너비는 6.8m이고 길이는 3.1m의 바닥은 화강석을 깔았고 그 주위를 따라 여장을 둘렀다. 문루는 정면 3칸(7.15cm), 측면 1칸(3.1cm)의 홑처마합각집으로 작고 소박한 편이다. 안은 통천장으로 하였고 사방은 탁 틔워놓았다. 앞뒤로 8개의 자연 초석을 배치하고 직경 30cm, 높이 2.5m의 흐름식 기둥을 세워 앞뒤로 보를 가설하고 장여와 주도리를 설치하였다. 보는 경간 중심부에 너비가 20cm이고 두께가 10cm, 높이는 38cm인 대공을 세워 마루 장여를 설치하여 서까래를 박고 양 측면에 박공을 붙인 단순한 건물이다. 현무문의 단청은 이 건물의 격에 맞게 모루단청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매개 부재들의 단청 무늬는 가장 단순한 것을...
역문협 2021.03.18 1 조회 764 | 지역: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성문 | 종목: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호남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호남리무덤떼는 호남리 마을 뒤편에 있는 광대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이 앞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 무덤들 중에서 호남리 사신무덤이 가장 잘 알려져있다. 호남리 사신무덤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돌칸흙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져있는 벽화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알 수 없으나 무덤의 크기와 내부구조를 보아 당시 높은 계급의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무지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40cm, 높이는 4m이며, 무덤의 구조는 안길과 주검칸으로 이루어졌고 방향은 남향이다. 사신도는 무덤칸 4벽에 배치되었는데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이 있으며 사신도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해당 무덤의 벽화에는 특징적인 점이 많다. 먼저 청룡은 다른 벽화무덤의 청룡과 달리 머리를 뒤로 돌렸으며 꼬리가 길게 뒤로 뻗어나간 것이 아닌 오른쪽으로 구부려서 머리와 마주하고 있다. 주작은 머리에 빗장식이 있으며 날개와 꼬리가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다른 무덤의 주작과 다르게 머리가 반반하며 날개와 꼬리가 매우 단순하다. 현무도 다른 무덤과 달리 뱀의 머리가 거북의 꼬리 쪽으로 치켜들고 있다. 이 무덤은 사신도만을 그린 무덤들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고구려 벽화무덤의 변천과 사신미술의 발전 과정을 밝혀주는 가치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호남리7호무덤은 호남리 사신무덤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무덤떼 가운데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무지는 남북길이 13m, 동서길이 10m, 높이 1.5m의 방대형을 이루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사람뼈와 관못, 장식품 등이 있는데, 남벽 가까이서 무질서하게 나온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도굴된 것으로...
역문협 2021.03.18 0 조회 573 | 지역: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 시대: 고구려 | 유형: 고분 | 종목:
화성리 쌍곽분은 대성산 지맥이 서쪽으로 뻗은 끝의 남향 경사면이 끝나는 곳에 있다. 이 경사면에는 10여기의 동일한 유형의 무덤이 질서 정연하게 위치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 고분군에 대한 계획적인 발굴이 아니며 이미 파괴된 것을 정리하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발굴은 1기에 그치고 말았다. 발굴된 1기는 이미 도굴되었으며 무덤의 외형은 본래 주변의 무덤들처럼 방대형의 석기 단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현재는 봉토가 대체로 둥그나 동서 20m, 남북 17m, 높이 3m 정도이다. 묘실 천정은 이미 붕괴되어 봉분이 내려앉았으며 우수에 의한 유실로 납작한 상태이다. 묘실은 봉분 중심부에 동서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곽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곽실은 무덤 중심부에 각기 독립 연도를 가지고 있으며 묘실은 남향이지만 동쪽으로 13°가량 치우쳐져 있다. 두 곽실은 북쪽으로 170cm, 남쪽으로 160cm를 두고 있다. 동곽의 곽실 넓이는 북면 179cm, 남면이 176cm로 남면 서측에 치우쳐 81cm 넓이의 연도가 있다. 곽실의 길이는 동면이 254cm, 중심부는 256cm이며 서면은 연도 끝까지 398cm이다. 곽실 바닥은 북, 남, 서 3면을 둘러 한 단 낮은 배수시설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벽에 붙은 방바닥이 관대를 이루고 있다. 서곽의 곽실 넓이는 북면 171cm으로 남면도 동일하고 남면 동측에 치우쳐 약 90cm 넓이의 연도가 있다. 곽실의 길이는 서면 247cm, 중심부 253cm이고 동면은 연도 끝까지 306cm이다. 곽실 바닥은 동곽과 비슷하게 북, 동, 남 3면을 둘러 한 단 낮은 배수시설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서벽에 붙은 방바닥이 관대를 이루고 있다....
역문협 2021.03.05 0 조회 547 | 지역: 평양시 용성구역 화성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고분 | 종목:
역문협 2021.03.05 0 조회 575 | 지역: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고분 | 종목:
토포리 불당골무덤은 장수원동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광대산의 서쪽 산기슭의 남쪽 경사면에 있다. 불당골에서 수십기의 고구려돌칸흙무덤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무덤무지가 제일 큰 토포리큰무덤과 토포리1호무덤, 토포리2호무덤, 토포리3호무덤 등이 있다. 토포리큰무덤은 가장 규모가 큰 무덤으로 5세기 고구려시기의 유적이다. 무덤칸은 돌로 쌓았고,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남향이다. 널방의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천장이다. 무덤칸의 내부 즉 벽과 천장 및 바닥에는 회미장을 하였다. 널방 바닥에는 관대를 설치하였는데 거기에서 돌베개가 발견되었다. 널길은 널방 남벽 중심부에 달렸는데 길이가 6m이다. 널방 입구에서 밖으로 약 70cm 되는 곳에 문확구멍이 양쪽으로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이곳에 두 짝의 문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무덤무지는 방대형이며 그 기저부에는 기단석을 쌓았다. 이 무덤은 무덤무지기저부의 기단석과 특별히 긴 널길 등 구조적인 특징이 있어 고구려돌칸흙무덤의 변천과정과 선행한 묘제인 적석무덤과의 계승관계를 밝히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토포리1호무덤은 4세기 고구려시기의 유적으로, 무덤무지는 많이 흘러내렸으나 외형상 방대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무덤은 주검 하나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규모의 널방에 커다란 널길이 달린 독특한 형식의 외방짜리 무덤칸이 동서로 나란히 놓여있는 쌍무덤이다. 동쪽의 무덤칸의 널방은 261cm, 너비 94cm, 높이 100cm정도로 주검 한 구를 넣기에 알맞다. 널길은 길이 272cm, 너비 119cm, 높이 154cm 이다. 널방은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으로 짰으며 널길은 납작한 돌로 쌓고 회미장을 하였다. 서쪽 무덤칸 역시 생김새와 재료, 축조방법이 동쪽의 무덤칸과 같다. 이 무덤은 고구려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의...
역문협 2021.03.05 0 조회 458 | 지역: 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8호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에 있는 칠성문은 옛날 평양성의 북문으로, 보통문과 함께 평안북도 의주 방면으로 통하는 성문이었다. 칠성문이라는 이름은 ‘북두칠성(北斗七星)’에서 ‘칠성’을 따서 지은 것으로, 북문이라는 뜻이다. 칠성문루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서평양 일대와 보통강구역 일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문루는 규모가 작은 편이나 구조가 간결하면서 밑 부분의 복잡한 구조와 잘 어울려 위엄있게 보인다. 칠성문의 창건 연대는 고구려 장안성의 축조 당시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있는 축대는 922년(고려 태조 5년)으로 추정된다. 칠성문의 문루는 1711년 혹은 1712년(조선 숙종 38년)에 개축되었다. 칠성문은 다른 성문들과 다른 일련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성벽과 일직선상에 문을 내지 않고 주위 지형을 이용하여 좌우 성벽이 성문에 의하여 한번 꺾인 듯이 문을 낸 것이다. 그리하여 성문은 성벽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으며 동쪽은 성벽이 북으로 뻗고 서쪽은 둥그렇게 배를 내밀고 돌아간 옹벽을 쌓았다. 그 다음 남으로 성벽이 뻗었는데 돌은 네모낳게 다듬어서 정교하게 쌓았다. 이처럼 칠성문은 무지개형의 성문 통로와 옹벽 그리고 성벽을 쌓은 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곡선미를 느끼게 해준다. 축대는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고 거기에 홍예문길을 냈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를 쌓았고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3칸(7.38cm), 측면 2칸(4.36m)이며 문루의 바깥쪽으로 돌아가면서 세운 흘림기둥은 가운데칸을 넓혀 중심을 강조하였다. 칠성문은 양쪽 성벽을 조금 어긋나게 쌓고 성벽과 직각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성문을 놓는 것은 고구려식 성문의 특색 중...
역문협 2021.03.05 0 조회 487 | 지역: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성문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20호 청류정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금수산 청류벽에 위치하여 평양성 내 성벽을 끼고 자리 잡고 있는 누정이다. 동북쪽 청류벽 아래로는 대동강과 능라도가 내려다보이고 대동강 건너편에는 문수거리의 고층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원래 청류정은 평양성 내성의 서문인 정해문의 문루로 고구려 때 세워졌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1716년(숙종 42년)에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일제는 1972년에 평양을 통치수단에 맞게 정리하면서 정해문을 헐어 현재 위치에 옮겨 지었는데 공사를 할 때 신중하게 진행하지 않은 탓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며 그마저도 6∙25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지금의 청류정은 평양건설대학에서 건물의 원상태를 살려 1959년 5월 15일에 준공한 것으로 그 후에도 수차례의 중보수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 관리가 되고 있다. 청류정은 정면 3칸(길이 11m), 측면 2칸(길이 6.2m)의 규모를 가진 팔각지붕의 단층 누정이다. 경사지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낮은 기단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청류정의 특이한 점은 평면구조에 있다. 기둥 사이의 공간이 다른 누정과 달리 청류정의 중심 공간이 양좌우의 공간보다 넓다. 이로 인해 건물의 내부 공간이 넓고 훤한 효과를 준다. 이러한 건물 양식은 청류정이 본래 문루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루는 석축 중앙에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 위에 세우게 되는데, 문루의 중심 공간은 축조된 홍예문의 좌우 폭에 맞추어 기둥을 배열하는 것이 안정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성문의 좌우...
역문협 2021.03.05 0 조회 543 | 지역: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누정 | 종목:
▷지정번호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9호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에 위치하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 시기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세워진 누정이다. 장대란 전투시 군사의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뜻하며, 을밀대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을밀대’라는 이름은 이 봉우리의 옛날 이름인 ‘웃밀이언덕’에서 유래했다는 설, 또는 이 장소에 ‘을밀선인’이라는 선녀가 자주 놀러 온 장소라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는 수나라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시기, ‘을밀’이라는 이름의 장수가 이 대를 지켜 싸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전설들은 을밀대의 역사가 짧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름과 관련하여 을밀대는 ‘사허정’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사방이 트여있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부벽루, 영명사 등과 함께 ‘평양8경’ 중 하나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을밀대의 축대는 1714년 조선 숙종 때 위의 누각과 함께 보수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하지만 일부분은 현재까지 고구려 축성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축대의 모서리 부분이다. 축대의 모서리 부분은 크기가 큰 통돌을 사용하여 들여쌓기를 하고 있다. 윗칸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것이며, 건물이 웅장하게 보이게 한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건물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해준다. 두 번째는 육합쌓기를 들 수 있다. 여러 돌들은 단순하게 쌓아 올려지지 않고, 하나의 돌이 여섯...
역문협 2021.03.05 1 조회 626 | 지역: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건축물 | 종목:
2011년 북한의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연구집단이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의 평양민속공원 건설장에서 고구려 시기 첨성대로 추정할 수 있는 건축지 유적을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와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사가 주목된다. 두 문헌에는 각각 “(평양) 성 안에 구묘(九廟)와 구지(九池)가 있다. 구묘는 바로 구요(九曜)가 날아든(飛入) 곳이다. 그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다”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동안 문헌 기록들과는 다르게 실제 고구려 첨성대가 발견된 사례가 없었기에 안학동 첨성대 유적의 발견 기사는 매우 이례적이다. 보도에 따르면, 안학동의 첨성대 유적은 안학궁성 서문에서 서쪽으로 약 250m 떨어져 위치하며, 유적의 총 부지 면적은 약 380㎡라고 한다. 형태는 한 변의 길이가 9.1~9.2m인 7각형의 시설과 그 안에 돌과 석회를 다져서 쌓은 4각형 시설이 있다. 4각형의 시설은 남북길이는 7.5m, 동서 너비는 6.7m이며, 가운데가 비어 있어 기초부가 드러난다. 아래 기초부의 크기는 남북은 7.2m, 동서는 6.7m, 폭이 2.1m이며, 그 안에 숯과 석회가 교대로 쌓여있다. 숯은 건축물 안의 온도를 조절한 목적에서 추가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숯을 통한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하였을 때 건축물의 연대가 약 5세기 초라고 보고된다. 그 밖에 발굴 과정에서 주변의 대성산성을 비롯해 여러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된 붉은색의 승문 기와 조각 여러 점과 정릉사지에서 발굴된 것과 색·재질·두께 등의 여러 외형적 특징들이 같은 질그릇 조각 여러 점이 발견되었다고 북한 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북한 학계는 이러한 결과와 보고를 통해...
역문협 2021.03.05 1 조회 648 | 지역: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건축터 | 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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