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의 민족

 

김지호

칼쓰기는 칼로 상대방을 베거나 찌르며 적수의 습격을 막는 방법을 익히는 무예다. 이 민족무예는 전투나 사냥에 직접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칼쓰기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랜 것이다. 칼쓰기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무덤들의 벽화를 통하여 생동한 장면을 엿볼 수 있다. 칼쓰기는 고구려인들의 무술연마에서 주요한 종목의 하나였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말타고 칼쓰는 장면, 칼춤, 칼곡예를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칼쓰기가 널리 성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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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릉(안악제3호분)의 행렬도칼과 방패를 든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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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12호무덤 벽화

 

고대이후 면면히 계승 발전되어 온 칼쓰기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통으로 더욱 굳어졌다. 이 시기에 다양한 칼쓰기 방법과 기술, 경기방법과 판정법 등이 구체적으로 규범화되었다.

칼쓰기를 위한 기본무기는 칼이다. 칼쓰기에는 칼의 형태와 성능, 용도에 따라 구분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칼이 이용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여도 검과 도를 구분하여 썼는데 검이란 양면에 칼날이 있는 것이며 도란 한 면에만 칼날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는 그러한 구분이 없이 뒤섞어 쓰다보니 검과 도의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조선시대 무기로 사용된 칼을 크게 나누어보면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긴칼(장검)이며 다른 하나는 짧은칼(단검)이다. 긴칼은 칼날은 짧으나 칼자루가 길었다. 긴칼의 칼날은 오히려 짧은칼의 칼날보다도 짧았다. 짧은칼은 전체의 길이와 칼자루가 짧으며 칼날은 오히려 긴칼보다 길었다

이 시기 구체적인 칼종류는 6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도, 제독검, 본국검, 쌍도, 월도, 협도 등이었다. 예도는 칼날의 길이 33(1m), 자루의 길이 1(30cm)로서 우리나라 칼 가운데서 칼날의 길이가 제일 긴 것이었다. 제독검과 본국검은 예도와 비슷하였다. 쌍도는 칼날의 길이가 25(75cm), 자루의 길이는 55(16cm) 밖에 안되었다. 월도는 칼날의 길이가 28(84cm)이며 자루의 길이는 64(193cm)로서 긴칼에 속하는 것이다. 협도는 월도와 모양이 비슷하였는데 크기가 그보다 더 컸다. 칼날의 길이는 3(90cm)이며 자루의 길이는 7(212cm)로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긴 칼이었다. 이 칼들 가운데서 허리에 차고 다니던 칼은 예도, 제독검, 본국검 등이며 이것들은 월도나 협도에 비하여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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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도 / 협도

 

칼쓰기에서 적용한 칼쓰기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칼쓰는 법에는 대체로 한손으로 쥐고 하는 칼쓰기, 두손에 칼을 따로따로 쥐고 하는 칼쓰기 등의 방법이 있었다. 칼쓰기의 구체적인 방법은 교전총도’, ‘예도총도’, ‘제독검총도’, ‘본국검총도등으로 구분하여 그린 몇 십 가지의 전법에 대한 그림에 전해온다. 그러나 칼쓰기의 다양한 수법과 경기방법, 평가규정 등에 대한 내용은 전하는 자료가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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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총도

 

조선시대 군영 밖에서는 칼쓰기를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것도 없었고 경기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칼쓰기는 공식적으로 장려되지는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684년 좌의정이었던 민정중은 국왕에게 제기한 상주문에서 백성들이 검계를 만들어 진법을 서로 배우고 있으며 마을마다 이것이 더 성하며 앞으로 난처한 일이 생길까봐 겁이 난다고 하면서 검계에 망라된 자들을 찾아서 체포하여 멀리 쫓아버리거나 목매달자고 하였다. 검계란 칼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인 민간단체였다. 당시 백성들은 자체로 계를 모으고 칼쓰기를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백성들이 저들을 반대하여 들고 일어날 것이 두려워 성행하기 시작한 검계를 탄압하고 무술을 연마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폭압과 방해 속에서도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오던 칼쓰기법을 고수하고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칼쓰기법은 백성들 속에서 하나의 풍습으로 계속 계승발전되었다.